‘가을은 남자의 계절’. 이 말보단 여름 내내 살찌워진 대하와 전어를 먹을 수 있기에 가을은 먹방의 계절이라는 말이 더 와 닿는다. 천고마비라는 사자성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닌 듯, 다이어트의 계절 여름에도 왕성한 식욕이 가을이 되니 절정에 다다른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했나. 무등시장에 있는 조그마한 횟집에서 제철해산물을 먹을수 있다는 소문이 내 귀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오늘은 그 소문의 중심으로 찾아가 본다.
월산동과 주월동의 경계에 위치한 무등시장의 끝자락에 가면 기분 탓일까 유난히도 밝게 빛나는 완도회포차를 마주할 수 있다.
역시 제철을 맞은 대하와 전어를 나만 찾는 건 아닌가 보다. 맛깔스러운 자태를 마주하기 위해서 대기자들도 있을 정도다.
직원이 호탕한 목소리로 “들어오세요”가 학창시절 저녁식사시간이 되면 놀이터까지 들리던 어머니의 부름마냥 반갑다. 싱싱한 전어들이 헤엄치는 수조관을 지나 매장 안으로 입성한다.
역시 소문의 근원지답다. 자리를 가득 채운 건 당연하다 못해 빽빽하다. 왁자지껄. 이런 곳에서는 오순도순 대하의 껍질을 까는 걸 기대해서는 안된다.
광어, 우럭 등의 활어와 해삼, 멍게 등의 해물부속 등이 적힌 사시사철 붙어있는 메인메뉴도 있지만, 오늘은 수기로 써진 제철 음식들에 눈이 간다.
여기를 찾은 목적이 바로 대하구이(45,000원)과 전어물회(35,000원)다. 전어 마니아라면 회, 구이, 무침이 함께 나오는 전어모듬세트도 괜찮다.
어떤 메뉴를 주문하더라도 속칭 스키다시라고 부르는 반찬이 푸짐하다. 이날은 샐러드, 연두부 오리훈제, 단호박찜, 번데기, 양념게장, 미역국이 1차로 나온다. 이것이 바로 횟집의 매력. 가을을 기다려왔기 때문인가 번데기 조차도 맛있다.
젓가락질을 몇 번이나 했을까. 점원의 손에는 뜨거운 온기를 품고 있는 달걀찜과 콘치즈가 들려있다. 폭신한 달걀찜과 고소한 콘치즈의 맛은 명불허전.
인제 그만 나와도 됐다 싶은데, 하나 더 나온다. 주연급 대접을 받아 왔던 삼계탕이 곁들이 음식의 하이라이트다.
새까만 국물과 닭의 모습에 순간 오골계가 아닐까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흑미를 넣어 끓여낸 삼계탕이란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닭에 흑미의 풍미가 더해지니 말 다 했다.
이것들에 현혹되어 과식은 금물이다. 맛깔스러운 반찬도 좋지만 우리의 본래의 목적을 잊지는 말자.
곁들이 음식을 하나씩 다 맛도 봤으니 소화를 시키면서 대하를 맞이할 준비 한다. 이윽고, 대하가 냄비에 담겨 나왔다. 기다렸던 오동통한 대하가 소금밭 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대하의 자태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맛있는 대하구이를 위해서는 뚜껑을 닫은 채로 익혀야 한다며 아주 잠깐의 포토타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사진도 찍었으니 뚜껑을 닫은 채 25마리의 대하가 맛있게 익어가길 지켜본다. 파닥파닥 뛰던 살아있는 대하가 가스버너 열기에 점차 힘을 잃어가면서 군침도는 색깔로 변했다. 잘 익었음을 뜻한다.
정확한 타이밍에 점원이 한 손에는 가위, 또 다른 한 손에는 집게를 들고 유유히 자리로 와서는 “새우머리 잘라드릴게요~” 한 마디를 건낸다.
몸통에 내장을 흘리지도 않고 머리에 살점을 남기지도 않고 아주 만족스럽다. 올해에 만해도 벌써 수 천마리의 새우머리를 자른 고수의 가위질답다.
이제 먹을 일만 남았는데, 남성분들이라면 껍질을 까줄 일이 남았다. 손수 까먹기 귀찮아서 대하구이를 먹지 않으려는 여성분들이 꽤 되기 때문이다.
제철 대하로 그녀의 건강까지 채워주면서 먹기 편하게 껍질까지 벗겨주는 섬세한 남자 컨셉으로 그녀의 마음도 잡아보자.
동성 친구와 방문했을지라도 서글퍼하진 말라. 누군가의 눈치 볼 필요 없이 초장을 듬뿍 찍어 맘껏 대하를 즐기기만 해도 좋다. 소금과 함께 구웠으니 이미 적당한 간은 되어 있으니 대하의 본연의 맛을 즐기려면 그대로 즐겨도 된다. 가을에 성큼 다가선 듯하다.
완도회포차에서 맛난 두 번째 가을의 맛은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다. 전어는 회, 구이, 무침 등 쓰임새가 다양한데, 오늘의 메뉴는 물회다.
육수를 담고 그 위에 해물부속, 해초와 채소 그리고 주인공인 전어회까지 얹었다. 대하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최강 비주얼을 자랑한다.
국자를 사용하여 모든 재료를 한데 잘 섞이도록 한다. 육수가 살얼음으로 되어 있어 처음에는 되직하지만, 살얼음이 녹으면서 알맞은 농도로 변모한다.
전어회와 여러 가지 재료를 최대한 많이 올려 한입 한다. 전어 특유의 거칠면서 부드러운 식감과 아삭한 채소가 씹는 맛을 살리고, 해초와 전복, 멍게 등의 부속으로 바다 향을 가미한 물회다.
그러나 전어의 식감이나 다소 자극적인 육수의 맛이 식사용보다는 확실히 소주에 어울리는 아재 입맛에 가까운 물회다.
푸짐한 전어물회는 냉면사리로 마무리할 수 있다. 남은 물회에 냉면사리를 넣고 면발을 풀어주면 얼큰한 물냉면 겸 회냉면으로 변신한다.
냉면사리가 들어가고 나니 어린 입맛들도 비로소 끄덕거리는 맛으로 변한다.
대하구이에 전어물회, 냉면사리까지 마무리하고 배를 두드리는 찰나 잠시 우리 곁을 떠나 있던 새우머리가 다시 우리에게 왔다. 새우머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해 주는데 이곳은 버터구이가 아니라 튀기는 방식을 택했다.
바삭한 식감. 이 순간만큼은 웬만한 이자카야의 고급스러운 새우튀김이 안 부럽다. 물회로 소주 한 잔 했다면, 이번에 맥주가 생각난다. 이래저래 취할 수밖에 없는 메뉴 구성이다.
대하구이, 전어물회를 의기양양하게 클리어했다. 그러나 웬걸 또 나온다. 완도회포차에서 활어회만큼 자신 있어하는 생선구이가 나온다. 아 배부른데 하면서도 막상 집으니 언제 배불렀나 싶을 정도로 뼈만 남겨놓게 된다.
생선구이 옆에는 간장게장까지 자리한다. 이젠 배부르다고 말하는 것도 지쳤다는 듯이 말없이 껍데기에 밥 한술까지 말아서 쓱쓱~. 배가 불러도 맛있는 건 맛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저녁 식사가 끝났다. 가을 제철인 대하와 전어, 그리고 해산물까지 한상 거하게 먹고 나니 가을을 식사한 느낌이다. 이것으로 나는 가을맞이를 모두 마쳤다. 어서 오색찬란한 단풍이 들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