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冷麵)이란, 말 그대로 차가운 국수다. 제빙기술이 없었던 예전에는 장독대 동치미 국물에 살얼음이 어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던 별미였다. 지금처럼 시원한 에어컨 밑 대신, 온 가족이 구들장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먹었던 음식이 바로 냉면이었다.
아무리 별미였다지만, 언제까지 추운 겨울에 구태여 살얼음을 입에 넣을 순 없는 일. 제빙기술의 발달은 드디어 냉면의 계절을 여름으로 돌려놨다. 그리하여 오늘날 ‘여름’하면 생각나는 음식 1등에 오른 냉면! 아,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온다.
30도에 육박하는 냉면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럴 땐 시원한 냉면 한 그릇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수완지구 먹자골목에 갓 오픈한 신상 냉면집을 찾아 나섰다.
다양한 고깃집, 횟집, 치킨집, 술집 사이 유일하게 냉면집이 있다. 웅장하지도, 대형주차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유니크함에 존재감이 빛난다.
냉면집에 당도했는데 어디서 낯익고 좋은 냄새가 난다. 무언의 호객행위를 하듯 주방의 문을 열고 숯불에 열심히 고기를 굽는 사장님을 뵐 수 있다.
그렇다. 이 곳은 육쌈냉면을 파는 곳이다.
주변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냉면집이어서 그런지. 고기 굽는 냄새에 현혹돼서 그런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40석 규모의 식당을 손님들이 금세 자리를 메운다.
테이블별로 메뉴판이 붙어있다. 메뉴를 고르기 위해 내 굳어버린 거북목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아도 돼서 좋다.
입구에서 코끝을 찌르던 석쇠불고기와 결합된 냉면류와 냉면의 절친 왕만두가 기본적인 구성이다. 거기에 왕갈비탕과 같은 식사메뉴도 대기 중이다. (냉면 다음으로 많은 주문이 있는 메뉴가 왕갈비탕이다.)
흔히 볼 수 없는 회냉면과 물냉, 비냉, 그리고 수제왕만두를 주문하고 나니 비로소 이 집의 철학이 담긴 문구가 보인다.
자가제면(自家製麵). 즉 대량으로 공급된 면이 아니라 가게에서 직접 뽑아낸 면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직접 우려낸 육수로 만들어낸 함흥냉면전문점이란다.
시원한 냉면을 만나기 전에 입가심용도로 곰국 주전자를 내어준다. 직접 뽑은 육수를 사용하는 집에서만 볼 수 있는 시그니처 같은 것이다.
허한 속에 갑자기 차가운 냉면을 허겁지겁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 육수 한 컵으로 위장을 스트레칭하는 것이 좋다. 진한 사골곰국 같은 뽀얀 국물 맛에 더 달라고 요구했더니 ‘언제든 더 줄게’하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리필도 해준다.
찜기에 수증기 열기로 쪄낸 수제왕만두(6,000원)부터 나온다. 아이들 주먹만한 크기다. 두껍지 않은 만두피 안으로 꽉찬 내용물들이 살짝 살짝 보인다. 곧 유행할 See-Through 패션 같은 설렘이 있다.
왕만두 5개가 한 판인데, 양이 너무 많다고 느끼시는 분들에게는 3개(4,000원)도 주문할 수 있다.
만두피의 두께가 적당해 옆구리 터질 일 없이 쫀득쫀득한 식감이다. 적당한 회전율로 쪄 놓은 지 오래 되지 않은 상태의 만두라 딱딱함도 없다.
돼지고기와 부추 등으로 만든 만두소를 쫀득쫀득한 만두피에 제법 실하게 채웠다. 역시, 만두는 냉면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포만감을 채워주는 증명된 단짝이다.
냉면에는 석쇠불고기, 반찬이 함께 나온다. 냉면 한 그릇에 고기 한 접시의 구성이라면 ‘괜찮다!’라고 느꼈을 텐데. 보시는 사진 속 고기는 냉면 두 그릇에 내오는 양이다.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쉽다. 하지만 석쇠 향을 머금은 고기의 육즙은 괜찮다.
함께 나오는 절임무와, 열무김치는 냉면과 곁들이기 좋다.
살얼음 띄워진 진한육수에 면을 얹고 배와 오이, 달걀, 고기 2점. 이렇게 올려 진 물냉면이다. 진한 육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지만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음미해본다. 육수의 맛에 장을 추가하여 짭쪼름한 맛도 나는 냉면국물이다.
짭쪼름한 맛이 감돌기 때문에 구미를 더 당긴다고 해야 할까. 거기에 취향껏 식초와 겨자를 넣어 국물 맛을 완성한다.
진냉면은 전분을 기초로 한 흰색 면발이다. 감자전분, 고구마전분을 사용하는 것이 함흥냉면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쫀득하지만 앞니로 끊기 어려울 정도로 질긴 면도 있는 게 함흥냉면이다. 허나 여기는 다른 재료도 배합하였는지 쉽게 끊긴다. 다른 함흥냉면에 비해 면발이 살짝 두꺼운 편이기도 하다. 오돌오돌 씹는 식감이 살아있다.
그대로의 냉면도 시원한 별미이지만, 역시 냉면은 후식으로 고기와 함께 먹을 때가 가장 맛있다. 그렇기 때문에 냉면 위에 얹어준 소고기 고명이나 석쇠불고기를 함께 곁들어 먹을 수 있게 고기를 빼놓지 않았다.
냉면을 위생상, 편의상 면을 가위로 2등분이나 4등분 낸 다음 깔끔하게 먹곤 한다. 그런데 원래 면요리는 길게~~ 무병장수하라는 의미로 만들어 먹던 요리이니 잘라먹지 않는 것도 의미가 있다.
물냉과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비빔냉면이다. 먹기도 전에 고소함이 느껴질 만큼 참기름을 아낌없이 넣었다.
비냉이라고 고명이 특이할 건 없다. 배와 오이, 수육 2점이다. 되직하지 않고 육수를 첨가해 살짝 묽어 쉽게 비벼지는 장점이 있다.
냉면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달걀 반쪽이다. 달걀을 먼저 먹어야할지, 나중에 먹어야할지 고민되곤 한다. 먼저 물냉을 먹을 때는 깨끗한 국물맛을 위해서 달걀부터 먹은 후 냉면을 먹으면 좋고, 비냉을 먹을 때는 매콤한 맛을 진정시켜주기 위해 가장 마지막에 먹는 것이 좋다.
양념과 면발이 한 데 잘 어울린다. 강한 매운맛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지만 은은한 매콤함과 달콤함, 그리고 고소함까지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비빔냉면이다.
매콤한 비빔냉면에 회를 무쳐 함께 올려야 본래 전통 함흥냉면이다. 홍어를 굵은 채로 썰어 식초에 담갔다가 매운 양념으로 무친 홍어회를 올려냈었지만 함경도에서는 참가자미를 많이 사용했다.
진냉면에서는 홍어회도 아닌, 가자미회도 아닌 코다리 회를 사용한 회냉면을 만날 수 있다. 명태를 반건조 시킨 코다리는 활어회가 아니기 때문에 쫄깃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평소 먹던 비빔냉면에 코다리회무침의 씹는 맛이 들어가니 고기가 빠졌어도 아쉽지 않고 오히려 괜찮은 맛이었다. 코다리회도 조금씩 더 내어주면 좋을 법하다.
'전통함흥냉면 전문점'이라 하지만 어떻게 보면 반죽의 방법, 회무침 등의 특징들이 전통 함흥냉면과는 조금 다르다. 함흥냉면의 특징은 살아 있으며 보편화 된 냉면의 맛도 느낄 수 있는 퓨전 같은 곳이다.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으로 구분 짓는 것보다 우리 입맛에 맞는 한국식 냉면이라 칭하고 싶다. 진냉면은 남녀노소 호불호 없이 더운 여름을 이겨 낼 그런 식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