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무더운 여름. 도청 앞에 광주의 냉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함흥냉면집이 있었다 한다. 학생들과 젊은 청년, 어르신들 누구나 할 것 없이 더위를 해갈시켜주던 냉면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냉면집은 마치 전설처럼 사라져버렸고, ‘여기로 옮겼다더라’, ‘이 곳이 그 사장님이 하시는 곳이야’라는 각가지 추측만 떠돌았다고 한다. 이제 그마저의 說도 사라져버린 지금, 아직 함흥냉면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곳이 있다 하여 찾아 나섰다.
그 명맥은 지산동 법원 밑 식당가에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찾던 그 1979년 그 함흥냉면집일까. 허르스름한 매장 간판에 ‘구)도청 함흥냉면’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물론 그 집이 옮겨진 것일 수도 있고, 그 식당에서 무엇인가 전수를 받은 곳 일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직접 손반죽한 전통냉면을 만날 수 있으매 감사해하며 입장한다.
어렸을 적 우리집의 장판, 창호문을 활용한 칸막이 등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내부이다. 매장의 입구 테이블은 운명을 달리하고 어느덧 식사를 준비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는 공간이 식사하는 공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갔을 핑크색 방석이 반갑다.
구석탱이 공간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메뉴판이 걸려있다. 냉면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육류와 식사류도 판매한다.
여러 테이블에 버섯불고기가 미리 나와서 손님을 마주하고 있는 걸로 보아 버섯불고기도 잘나가는 점심메뉴인 듯하다.
냉면집에서 화려한 한정식반찬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무절임, 배추김치, 열무김치, 시금치, 콩나물, 계란말이가 내어진다. 그런데 냉면집에서는 이마저도 많다. 평소 냉면과 가장 잘 어우러지는 반찬이 무절임인데 초맛이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를 주문하면 주전자에 뜨끈한 육수를 담아준다. 참! 잘 빼낸 육수 맛이다. 후룩~ 후룩~ 거침없이 목구멍으로 넘겨댄다. 싱거우면 소금을 약간 첨가해서 간을 맞추라는데 그럴 필요 전혀 없다.
어젯밤 꿈에서 조상님이 점지해주듯 물냉 하나와 비냉 하나. 둘 다 맛보는 것을 선택했다. 살얼음이 동동 뜬 물냉면부터 영접했다. 지금 다시 사진만 봐도 속 시원한데 30도가 웃도는 여름에는 먹고 돌아서면 생각날 비주얼이다.
기존에 알던 맑은 육수가 아닌 진한 육수다. 약간의 간장을 추가했다고 추측이 된다. 그 위에 무절임, 오이절임, 양지로 추측되는 고기도 한덩이. 그리고 빠지면 절대 안 되는 계란 반쪽 이렇게 입맛 돋우는 꾸미(고명)가 올려졌다.
왠지 고기고명이 없으면 냉면이 아닌 것 같은 나의 냉면철학에 부합하는 냉면이다. 서브에서 묵묵히 시원함을 담당하던 배 한조각은 함흥냉면에서는 과감히 제외했다.
소주와 맥주가 뒤섞인 속을 풀어주기 위해 얼음과 함께 육수를 들이킨다. 동치미국물을 사용하지 않아서 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육수 맛을 표현한다면 색깔처럼 맛이 진하다. 약간의 구수한 한방의 맛도 나면서 끝맛은 달착지근함이 따라오는 육수 맛이다.
생오이를 꾸미로 내었으면 오이향에 육수 맛이 그르쳤을 텐데, 오이를 절임으로써 육수맛은 유지하고 식감은 살렸다.
후식냉면의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낯선 맛일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육수들이 트랜드였다고 인정하면 기존과 다른 색다른 냉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음..!! 역시 물냉면이지!”라는 일행의 탄성에 반박이라도 하듯 비빔냉면이 놓여진다. 이제는 무엇이 더 맛있는 냉면인지 갑론을박 할 차례다.
비빔냉면 역시 고명으로 고기와 오이절임, 무절임 그리고 계란이 올라가 있다. 육수가 거의 없는 된직한 비빔냉면이 아니라 육수와 양념을 함께 넣어낸 냉면이다.
첫맛은 강렬하게 매운 비빔냉면은 아니다. 매콤한 맛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서 양념장을 추가로 배치했다. 육수를 함께 넣어져 있기 때문에 양념을 비비는데 막힘이 없어 휘~휘~ 쉽게 비벼진다. 젓가락으로 느껴지는 이끌림이 상당히 부드럽다.
냉면 면발을 보자. 어느 순간부터 칡으로 만든 냉면 면발이 지분을 상당수 차지하고 있다. 칡냉면은 탱글탱글하지만 이로 쉽게 면이 잘린다. 그러나 함흥냉면은 고구마전분이나 감자전분으로 면을 뽑아 쫀득하지만 대체로 칡냉면에 비해 질기다.
하지만 그런 식감마저도 좋다. 면발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흡입하여 주는 게 함흥냉면을 제대로 먹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양념이 풍부하여 목넘김도 부드럽고 면발의 씹힘도 살려주고 있다.
면은 한 끼 식사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곳의 냉면의 양은 푸짐하다. 그래도 다른 식사를 병행해야할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간택을 받은 버섯불고기가 괜찮을 것 같다.
국물채로 떠먹고, 고기와 버섯을 건져먹고, 달큰한 국물에 밥을 비벼먹어도 3색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 곳은 고기보다 맛있는 버섯을 건져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잘 익은 갈비나 삼겹살 한 점을 냉면 위에 올린 후, 고기와 냉면을 함께 먹는 것이 냉면을 잘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야들야들한 불고기를 골라 냉면과 함께 즐겨도 별미다.
예전에는 무조건 싸고 양 많은 것이 내 나름대로 맛집의 기준이었다면 어느 순간 ‘맛집’을 찾을 때 무언가 다른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전통을 지키는 집. 그리고 그런 요리. 필자와 같은 미식가들이 주변에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광주에서 전통을 지키는 냉면요리는 거의 불모지와 다름없다.
평양식냉면이 전무한 광주에서 나름대로 명맥을 이어나가는 함흥냉면집을 만난 것 자체가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