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전대 후문에서 일용한 양식을 찾아 헤매다 문득 고개를 들면 발견할 수 있는 코로나. 입구부터 멕시코 국기가 시신경을 사로잡는다. 대문 옆 거울에 붙여진 이 지도들은 웬 말인가.
떠나고 싶은 욕망을 겨우 달랜 허파가 다시 벌렁벌렁거린다. 발걸음은 이미 인천공항 활주로에서 공중부양을 시작한 것 같다.
이곳은 외국의 게스트하우스 식당 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분위기다. 게다가 입장하는 손님들은 외쿡인 amigo(친구)들이 절반 이상이다. 곧이어 흥겨운 라틴 음악 속 세계의 언어로 이루어진 대화들이 피처링을 시작한다. 아, 메뉴판을 전해주는 직원마저 외쿡언니다. 여기 설마 이태원인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멕시코 요리들은 사연 많은 친구들이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를 점령하기 전, 아즈텍의 용맹스런 전사들이 주로 먹던 식단은 콩이나 옥수수 등의 곡식류였다. 고기 없이 살 순 없었던 스페인군은 소, 돼지, 닭고기와 와인, 양파 등을 들여와 멕시코의 재료들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진 셈이다. 또 한편으로, 멕시코 음식들은 미국 텍사스로 건너간 멕시코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식’으로 다시 한 번 변화를 맞이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맛보는 께사디야와 부리또, 타고 등은 미국식에 조금 더 가깝다.
부리또의 유래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20세기 초 멕시코혁명이 터졌을 때였다. 조그만 동네에서 음식점을 하던 후안 멘데스라는 사내는 그 난리통 속에서 혁명군을 배불리 먹일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음식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밀가루로 넓적하게 만든 판(또르띠야) 안에 콩, 고기, 야채 등을 넣고 돌려싼 것이다.
주문량이 폭증하자 그는 당나귀(스페인어로 burro, 부로)를 한 마리 사서 자신의 발명품을 강 건너로 날랐는데, 여기서 부리또 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과연 부리또는 그냥 먹어도 맛있는 또르띠야 속에 쌀과 고기, 콩, 양파 등이 꽉꽉 차 있고 거기에 맛깔하는 소스가 더해진 한 끼 식사다. 한 입 베어 물면 풍만한 고기향과 살포시 존재감을 알리는 콩의 달콤한 맛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적당히 구워진 또르띠야 또한 일품이다.
얇은 피자를 연상시키는 께사디야 위로 수놓아진 상큼한 사워크림과 짭짤한 치즈소스를 보라! 마치 한 폭의 현대미술 같다. 그 옆으로 멕시코 요리의 화룡점정을 이루는 할라피뇨와 나초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식탁 위에서 강렬한 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요리가 나온 순간부터 ‘사고’라는 걸 정지해버린 채 먹기만 했다. 이제 우리의 테이블엔 칵테일과 나초만이 남았다. 나초는 영화관에서 먹던 그 짜고 자극적인 과자가 아니었다. 적당히 바삭하고, 느끼하지 않으며 담백했다. 국그릇만한 크기에 담긴 치즈소스와, 강렬한 살사소스는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따뜻한 봄이 찾아왔는지 가게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열린 창문틈으로 들어온 살랑거리는 봄바람은, 식당 안을 부지런히 돌며 사람들의 정을 전달하느라 바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있던 그곳은 이미 한국이 아닌 듯했다.
그래서 더 떠나고 싶어졌다. 문득 벽에 걸린 멕시코의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얼마나 시간이 갔는지도 모를 만큼 바라보기만 했다. 밤은 깊어졌고, 음악은 무르익어갔다.